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for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사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요, 딱 세 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점을 연결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대학교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 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저는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심했죠.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 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하지만 제가 태어나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여자아이를 입양하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밤중에 이런 전화를 받게 됩니다: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그들은 말했죠.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알고 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 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 개월이 지나서야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 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순진하게도 바로 이곳, 스탠퍼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죠.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에서 그만한 가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제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전혀 몰랐고 대학이 그것을 알아내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지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그리고 여기서 대학에서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모두 쓰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당시엔 참으로 두려운 순간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자퇴한 순간부터 저는 관심이 없는 필수 수업을 듣는 것을 중단하고 훨씬 더 흥미로워 보이는 수업을 듣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음식을 사기 위해 5센트 보증금을 내고 콜라병을 반납했고 매주 일요일 밤에는 하리 카리슈나 사원에서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하기 위해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을 걸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죠.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그리고 제가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우연히 한 많은 것들이 나중에 값진 것으로 돌아왔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시 리드 대학은 아마도 미국 최고의 서예 교육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죠.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저는 자퇴를 해서 정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예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저는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 서로 다른 문자 조합 사이의 간격을 변경하는 방법, 타이포그래피를 훌륭하게 만드는 요소에 대해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과학적'인 방식으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답고 유서 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어서, 전 그것에 흠뻑 빠졌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 중 어느 것도 내 삶에 실제로 적용될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매킨토시를 처음 구상할 때, 그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Mac에 맞게 설계했습니다. 아름다운 타이포그래피를 갖춘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Mac에는 복수 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Mac을 따라한 Windows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들이 실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would have p.p: ~했을 것이다
ex) If you don’t have a boyfriend, would you have done a date with me?
⭐️would have p.p / could have p.p / should have p.p
○ but과 쓰임
I would have A, but I had to B. : 과거에 무엇인가 할려고 했는데 안그랬어
I would have called, but there was no phone service.
난 전화했을텐데(안했어), 전화되는 곳이 없었어.
I would have loaned you the money, but I didn't have.
난 너에게 돈을 빌려줬을 텐데(안했어), 그렇지만 난 하지 못했어.
○ 조건절이 앞에 올 경우
If I had known they were vegetarians, I would have made a salad.
만약 내가 그들이 채식주의자인것을 알았다면, 난 샐러드를 만들었을텐데
○ 조건절이 뒤에 올 경우
I would have made a salad if I had known they were vegeterians.
난 샐러드를 만들었을꺼야 만약 내가 그들이 채식주의자인줄 알았다면
I could have gone directily to colleage, but I decided to travel for a year.
난 대학에 바로 갈수 있었지만(가지 않았어), 1년동안 여행하기로 결심했어.
I'm sorry that I'm late for work. I should have woken up earlier.
미안해 지각했어. 내가 좀더 빨리 일어났어야 만 했어.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만약 제가 자퇴하지 않았다면 이 서예 수업도 듣지 않았을 것이고, 개인용 컴퓨터에는 그런 훌륭한 타이포그래피가 없었을 것입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대학에 다닐 때는 미래를 바라보며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다시 말하자면, 앞을 바라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를 바라볼 때 비로소 연결할 수 있습니다.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 점들이 미래에 어떻게든 연결될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직감, 운명, 삶, 카르마 등 무엇이든 믿어야 합니다.
Because believing that the dots will connect down the road will give you the confidence to follow your heart.
왜냐하면 현재가 미래로 연결된다는 믿음이 여러분의 가슴을 따라갈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 worn path. and that will make all the difference.
잘 알려진 길에서 벗어나게 될지라도 그것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oz와 저는 20살 때 부모님 차고에서 Apple을 시작했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만에 Apple은 차고에 단둘이 있던 회사에서 4,000명이 넘는 직원을 보유한 20억 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우린 그 1년 전에 우리의 최고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고, 저는 막 30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어떻게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해고당할 수 있을까요?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잘 맞는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그럴 때, 이사회는 그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퇴출됐습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말이죠.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제 성인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사라져 버렸고, 그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몇 달 동안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저는 이전 세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느꼈고 제게 넘겨진 바톤을 놓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 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하지만 서서히 무언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 dawn on me ~를 깨닫다, 명확해지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Apple에서 해고된 것은 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이었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성공의 무거움은 모든 것에 대해 확신이 없는 초보자의 가벼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그것은 제 인생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그 후 5년 동안 저는 NeXT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픽사라는 회사를 설립했으며, 아내가 될 멋진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인 토이 스토리를 제작했으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성장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놀랍게도 Apple은 NeXT를 인수했고, 저는 다시 Apple로 돌아왔으며, NeXT에서 개발한 기술은 현재 Apple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제가 Apple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 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때로 인생은 벽돌로 머리를 때리기도 합니다. 믿음을 잃지 마세요.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저는 제가 계속 나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제가 하는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는 연인과 마찬가지로 업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길에서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보세요. 안주하지 마세요. 마음의 모든 문제가 그렇듯, 찾으면 알게 될 것입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그리고 모든 좋은 관계가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좋아질겁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찾을 때까지 계속 찾으세요. 안주하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 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7살 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그 이후로 지난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는 일을 하고 싶을까?"라고요.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그리고 며칠 연속으로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올 때마다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도움이 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외부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거의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잃을 것이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당신은 이미 벌거벗은 겁니다. 때문에 당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죠.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약 1년 전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30분에 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에 종양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이것이 치료가 불가능한 암의 일종임이 거의 확실하며, 내가 3~6개월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일, 지위, 재산) 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것은 앞으로 10년 동안 아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단 몇 달 안에 아이들에게 말해야 한다는 의미였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신변을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 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그렇게 저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날 저녁에 저는 조직 검사를 받았습니다. 내시경을 목구멍과 위, 내장에 꽂고 췌장에 바늘을 꽂아 종양에서 몇 개의 세포를 채취했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저는 진정제를 맞았지만, 함께 있던 제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볼 때 울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수술로 완치할 수 있는 매우 드문 형태의 췌장암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의사들은 울기 시작했던겁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이것은 내가 죽음에 직면한 가장 가까운 사건이었고 앞으로 몇십 년 동안 가장 가까운 사건이기를 바랍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그것을 겪어본 저는 이제 죽음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당장 죽는 건 원치 않습니다.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목적지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죽음은 삶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이기 때문입니다.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그것은 삶의 변화의 주체입니다. 새로운 것을 위해 낡은 것을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은 새로운 것이 여러분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젠가 여러분은 서서히 낡은 것이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표현해서 미안하지만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시간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결과에 따라 생활한다는 독단에 갇히지 마십시오.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다른 사람의 의견이 당신 내면의 목소리를 압도하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마음과 직관은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세대의 바이블 중 하나였던 '지구 백과'라는 놀라운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이곳 멘로 파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시적인 감각을 살려 만든 작품입니다.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나오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구글이 등장하기 35년 전의 페이퍼백 형태의 구글과 비슷했습니다.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것은 이상주의적이었고 깔끔한 도구와 훌륭한 아이디어로 넘쳐났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그 과정이 끝난 후 최종판을 발행했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마지막 호의 뒷면에는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는 이른 아침 시골길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아래에는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그들이 떠나면서 남긴 작별의 메시지였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해 배고파하며 약간은 바보같이 도전해라"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그리고 나는 항상 그것을 나 자신을 위해 바랐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이 졸업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이 순간,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새로운 것에 대해 배고파하며 바보같이 도전하세요.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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